북 | 두 번째 인류
나라는 타자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고민하는 의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척도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에게는 비밀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라고 말했다.
우연히 마주했던 수원의 한 동네 도서관에서 두번째 인류라는 책을 만났다. 후루룩 넘기다 마주한 나라는 타자. 소재목이 끌려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않았다. 나라는 사람으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나는 나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기보다 다른이들이 나를 대하는 말투나 태도 그리고 표정으로 나를 알아차리곤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알아차림은 사실 나 그 자체라기보다 타자의 시선이겠지만 말이다.
짧지않은 시간을 살며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맨 정신엔 우스울 수 있는 말이겠지만. 웃음기빼고 사실 그렇게 많지 않은 거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공부를 하거나 드라마 따위에 시간을 보내며.. 바쁘게? 그보다 틈없이 시간을 꽉꽉 채우고 살고 있지는 았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이 책은 개인적인 취향의 장르는 아니다. 지극히 소설-스러운 기억에 담고 싶은 몇몇 장면이 있어, 그냥 보내기 아쉬운 마음에 관련 내용 몇 구절을 남겨 본다.
아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의 눈에 띄지 않는 것들과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회계장부나 유언장처럼 누구나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획일적인 본질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인격은 타인의 정신적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 는 아주 간단한 행동 또한 부분적으로는 정신적 활동이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물리적인 외양에다 우리가 그 사람을 보고 떠올리 는 모든 관념을 집어넣어 그 사람의 전체적인 모습을 만든다. 우리 가 만든 전체적인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그 관념들은 그 사람의 양 뺨을 가득 채우고, 콧날을 실제에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그리고, 목소리의 울림에는 마치 투명한 봉투를 씌운 듯 음색을 부여한다. 우리가 그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다시 발견하고 듣는 것은 그런 관념들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은 그들이 나를 보고 떠올린 관념과 나에게 갖는 바람으로 가득하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타자다.
그리고 책 중간에 한 영화가 소개되었다. 예전 29cm 앱에서 진행했던 문화 이벤트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해석이 담겨 있어 다시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은 단순히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마리안느 본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 이 된다. 마리안느는 포즈를 취한 엘로이즈뿐만 아니라 잠을 자는 모습, 성관계 후의 모습, 소피의 낙태를 돕는 모습, 타오르는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그린다. 그런데 이 그림 중 어떤 것도 엘로이즈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엘로이즈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은 이 모든 그림을 나란히 늘어놓은 것이다. 엘로이즈의 어머니인 백작 부인이 딸의 모습을 그린다면 완전히 다른 그림이 탄생할 것이고, 미래의 남편이 그린 결과물도 완전히 다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페르소나(가면)를 갖고 있다. 그런데 가장 흔한 오해는 바로 이 수많은 가면 뒤에 '진짜 나'가 숨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타자다.
진짜 나는 누구인가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은 현대로의 과도기처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우리는 모두 무대에서 연기한다"고 말했다. 그의 유명한 저작 《자아 연출의 사회학: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에서 고프먼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지 설명했다.
고프먼은 세상이라는 무대를 앞무대(우리가 오로지 역할로서만 움직이는 무대)와 뒷무대(우리가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무대)로 나누었다. 우리 는 혼자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다른 '공연자들', 즉 주변 사람 들은 물론이고 학교나 대학, 동료 직원들이 모두 우리를 '호명'한다 고 다른 유명한 철학자가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전반적인 관습과 자신이 내던져진 사회의 상황에 따라 경험 한다. 고프먼은 "개체는 이리 돌았다가 다시 뒤집었다가 앞으로 구른다. (…) 마치 계속해서 균형을 잡고 자세를 바로 하고 조화를 이 루려는 곡예사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역할을 연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관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이 연기하는 역할의 뒷면을 보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든 타인이 잠시나마 가면을 벗은 순간을 포착하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을 무의 식적인 표현으로서 샅샅이 살핀다. 풍부한 몸짓, 숨이 가쁠 정도로 유창한 말, 갑작스럽게 붉어지는 얼굴 등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거 의 인식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모습을 더욱 철저하게 연기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 아마도 인간은 주변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아차리기 위해 늘 이런 이중적 읽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또한 모두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 과정의 대칭성이 복원된다. 사람들은 타인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관찰되는 사람은 관찰자가 자신의 '진정한' 태도를 쉽사리 알이차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감추기, 발견하기, 위장하기, 재발견하기는 무한히 순환한다."
고프먼이 묘사한 내용은 인터넷 시대에도 들어맞는다. 우리는 즉흥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 으로 발생하는 감정을 표현할 때, 계획적으로 의도에 따라 연출한 나를 보일 때보다 훨씬 더 솔직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 모두 연기자라면, 충동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을 감추는 경험을 쌓을 수록 자신의 모습을 연출해 타인을 속이는 데에도 더욱 능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흥적인 감정과 무의식적인 감정적 흥 분, 충동성마저도 꾸며내는 연기가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에서 자 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이 연기 기법 을 활용한다. 이런 포스트나 트윗, 블로그 글 등을 보고서도 그것이 연출된 삶'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정한 자아'라고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역할을 연기 할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연기할까?
고프먼은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으므로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뒷무대가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뒷무대가 존재할까? 애초에 뒷무대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있을까? 우리는 진정하고 진실한 자기 자신을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의 구경꾼으로 살면서 이 빌어먹을 '나'라는 존재 안에서 내가 구경꾼으로서 보고 있는 대상 이 도대체 누구인지 끊임없이 탐구하는게 아닐까? 우리가 자기 자 신을 전혀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인터넷 시대에 새로 떠오른 이념이 아니다.
세넷은 1970년대 중반에 “모든 개인에게 자아는 가장 큰 짐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아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몇 몇 문화철학자가 말하듯이 우리가 점점 심각해지는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시대는 이미 놀라 우리만치 오랜 시간 정지한 상태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욱 계층적이고 자유는 적은 시대에 그랬듯이 우리가 연기하는 역할을 자기 자신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곳으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산업 국가에 사는 우리는 어느 정도 정해진 길을 따르며 '스스로 꾸민 이력'을 갖는 대신 늘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편이 좋다(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다원화된 개인주의를 언급했다. 카림에게 다원화란 "고유한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 스스로 결정을 필요로 한다는 경험이다. 즉, 자신의 삶이, 고유한 세상으로의 접근 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경험이다. 그것은 (…) 개방성과 불확실성이 모든 정체성의 중심부에 침입하는 것이다." 카림이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표상의 의미가 바뀌었다. 음식부터 예술을 넘어, 영혼의 수행부터 성과 성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과 나 자신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이기 위해 자신을 정의하는 모든 것들을 새로 구성하고 짜맞춰야 한다(그리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위 소개된 리처드 세넷의 책도 주목할만하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기 위에 책과 관련 기사의 내용 일부도 함께 기록해본다.
이 책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는 것은 ‘변증법적 대화’와 ‘대화적 대화’의 비교다. 그리고 ‘공감’과 ‘감정이입’의 비교다. 변증법적 대화가 서로의 공통된 것을 감지해내어 하나의 종합으로 향해 간다면, 대화적 대화는 어떤 합의를 전제하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포괄하여 이해를 넓혀간다는 특징을 가진다. ‘난 너의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는 공감은 타인과의 동일시를 전제하는 반면, 감정이입은 ‘나는 네가 느끼는 고통에 관심을 쏟는다’며 너와 나의 구분을 전제하면서도 서로에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세넷은 "20세기는 연대의 이름을 내걸고 협력을 왜곡했다"며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확신감을 되살리려는 연대감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 생활을 잔인할 정도로 단순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사회적인 것’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의 원초적인 역량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출처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