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 뉴필로소퍼 2023 22호 - 자유를 향한 의지
“도덕적 용기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창의적 용기는 새로운 형식과 상징,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만한 새로운 양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롤로 메이
자유를 향한 의지
The Will to Freedom
"가장 내밀한 본성과 부대끼는 삶을 사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할 수만 있다 면・・・・・ 너를 그 고통에서 구하고 싶구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하나는 아 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적어 보냈다. 청년 쇼펜하우어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못해 무척 괴로워했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상인 수업을 받던 쇼펜 하우어의 진로와 철학가의 길은 상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요하나는 상인으 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대도시에 살며 존경도 받을 테지만, 학자의 삶은 정적 이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타일렀다.
오늘날 쇼펜하우어는 '살려는 의지 인간을 추동하는 병목적 갈망, 굶주림, 욕망에 대한 성찰로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좇으며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렇듯 네덜란드계 독일인 부호에게서 태어나 수많은 여행을 다녀본 청년 쇼펜하우어 였지만,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그의 '의지' 역시 잦아들 줄 몰랐다. 그것 이 그를 몹시도 괴롭혔다. 어머니 요하나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봐왔던 너는 네 존재에 만족하지를 못했지. 명랑하게 지내야 할 어린 시절을 네가 얼마나 즐기지 못 했는지. 우울한 기질은 또 얼마나 많이 물려받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요하나는 새로운 인생 계획을 세워 실천할 용기가 아들 쇼펜하우어에게 있기 를 바랐다. 그러려면 쇼펜하우어가 먼저 용기와 자유를 향한 의지를 스스로 불러 모아 야 했다. 용기는 무모함과 달라서, 타고난 본능의 힘에 이끌리며 발휘된다. 결국 쇼펜하 우어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자마자 상인 수업을 관두고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어차피 인생은 '살토 모르탈레'
철학자들은 '살토 모르탈레alto mortale' 단순히 '공중제비'를 뜻하지만, 말 그대로 옮기자면 '목숨을 건 도약'인 이탈리아어에서 일종의 근본적인 용기. 도덕적 위험에 맞선 그야말로 온전하고 절대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완벽한 상징을 찾았다. 사실, 완전한 결단력에 대한 더 나은 메타포를 생각해내기도 어렵다. 절벽 에 서서 내 몸의 절반만 강이나 바다로 내던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이미지에 대해 특별히 깊이 사고한 철학자를 두 명 꼽아볼 수 있다. 두 사람이 용기에 관해 가르치는 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들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듯하다.
1895년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 는 YMCA 하버드 지부에서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으 로 강연을 했다. 중심 주제는 자살이었지만 제임스는 이날 믿음과 용기에 관한 문제 도 다루었다. 이전에 제임스는 '불충분한 증거로 무언가를 믿는 것은 언제나 잘못됐 다'는 견해 예를 들자면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윌리엄 킹던 클리퍼드의 견 해에 반대했다. 제임스가 보기에 증거가 어느 쪽이든 완전히 설득력이 없는 경 우라 할지라도 인간은 항상 무엇을 믿을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에 이런 견해는 문제 가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떤 결정은 증거를 기다릴 수 없다. 17세기 프랑스 작가 블레 •즈 파스칼이 말했듯이 선택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탔다."
제임스는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주제의 연설에서 그런 믿음의 도약이 인생의 모든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불확실성에 의해서가 아니면 승리를 얻을 수 없고, 충실하거나 용기 있는 행동을 이룰 수 없다. ・・・・・・ 우리는 오로지 매시 시간 자신을 위험에 맡기는 자세여야만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때로는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더라도 나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그 일을 하기 위한 필요조 건이 된다. 그래서 제임스는 도약의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여긴다.
산을 오르다가 아찔한 높이에서 뛰어내려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에 지금 내가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는 성공할 수 있다고, 두 발이 대답하게 도약할 것이 라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과학자들이 불확실성에 관해 말했던 온갖 달콤한 말들을 떠올린다. 그렇게 너무 오래 머뭇거리다 보면 마침내 침 착함을 잃게 될 것이며, 덜덜 떨면서 절망적인 순간으로 뛰어들고 결국 심연으로 글 러떨어질 것이다.
이 현기증 나는 장면에는 역설이 얽혀 있다. 자발적인 믿음, 무언가를 믿기로 선 택한다는 바로 그 생각은 믿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생각은 말할 것도 없 고) 믿음과 의지의 관계에 관한 기본 가정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믿을 지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 진실인지 선택하는 것-우리가 '진실'이라는 개념에 매달 리려 한다면 아마도 진실을 선택할 수는 없을 테다-과 마찬가지인 듯하다. 제임스 가 말하는 등산가의 용기는 위험한 일을 하려는 의지뿐만 아니라, 땅에 안전하게 닿 을 것이라는 믿음, 눈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를 뛰어 넘는 믿음을 구현하는 의지이기 도 하다.
여기서 용기는 무엇보다도 신뢰를 닮아 있다. 모든 용기는 모든 신뢰와 마찬가지 로 무언가 근거 없는 것을 지니고 있다. 용기는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언제나 조금은 더 나아간다. 이처럼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용기가 아니라 단순한 예측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시도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도약을 시도하려면 용기 만 있으면 된다.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도약을 시도하려면 훨씬 더 많은 용기 만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