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저자의 신간(서사의 위기)이 나왔다. 인상적인 일부 내용을 포스팅으로 남겨본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야기의 영점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이야기 매체가 아닌 정보 매체다. 서사적으로가 아닌 첨가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파악되는 정보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되지 않는다.
"인생의 이벤트를 페이스북 프로필에 어떻게 만들거나 편집하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정보를 클릭하고, 좌측의 중요 이벤트를 클릭하세요."
삶의 사건들은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긴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사적 맥락 없이 그저 접속사로 연결된 채 나열된다. 사건의 서사적 합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성찰적 서사'와 살아온 이야기의 응축은 전혀가능하지 않으며 요구되지도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의 기술적 장치마저도 시간 집약적이고 서사적인 실천 Praxis은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 기록과의 차이다.
디지털 저장소가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이 서사의 길은 좁다. 선택된 사건만이 이야기에 동원된다.
이야기, 또는 기억된 삶은 필연적으로 그 사이사이에 틈이 존재한다. 반면 디지털 플랫폼은 빈틈없는 삶의 기록화에 관심이 있다. 덜 이야기될수록 더 많은 데이터와 정보가 생성된다.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데이터가 이야기보다 더 가치있다. 서사적 성찰은 요구되지 않는다. 만일 디지털 플랫폼이 이야기 포맷을 허용한다면,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데이터베이스에 호환되는 설계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야기 포맷도 강제로 첨가적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스토리'는 정보 전달자로 구성된다.
이것은 이야기를 말 그대로 사라지게 만든다. 디지털 플랫폼의 기술적 장치는 전체 삶의 기록화에 쓰인다. 즉, 삶 자체를 모두 데이터 기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서사적 실천이다. 정보의 쓰나미는 서사적 내면성을 파괴한다. 탈서사화된 기억은 '고물상', 즉 '온갖 종류의 완전히 무질서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그림들과 오래되어 낡아빠진 상징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창고'와도 같다." 이 고물상 안에 있는 사물들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더미를 만든다. 이 더미는 서사의 반대 형상이다. 사건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쌓아올려질 때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된다. 데이터 더미 또는 정보 더미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서사적'이 아니라 '누적적'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정보와 반대된다. 이야기는 완결성이 특징이다. 즉 종결형식이다. "둘은 (...)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한계가 없는 세계에는 신비로움도, 마법도 없다. 한계, 과정, 역치가 신비로움을 펼쳐낸다.
이야기는 빛과 그림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유희다. 투명성은 모든 이야기에 근거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긴장을 없애버린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Max Weber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작가 폴 비릴리오 Paul Virilio는 한 인터뷰에서 매우 작은 카메라의 발명을 다룬 공상과학 단편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이 카메라는 너무 작고 가벼운 나머지 눈송이로도 운반할 수 있다. 이 카메라를 인공 눈에 대량으로 섞어 비행기에서 아래로 뿌린다. 사람들은 눈이 온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가 카메라로 뒤덮이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는 완전히 투명해진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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