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와투사철회
투사와 투사의 철회는 성숙과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편견이 강해질수록 겉으로는 부인할지라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게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두려워진다. 이 두려움이 도전을 받으면 광적인 분노와 공포로 표출된다. 돌을 던지고 집을 부수고 사람을 해한다.
이 광기의 본질은 결국 자기 혐오이다. 자신의 인간성 중 열등하게 간주해서 수용이 불가능한 부분은 부인하 고 억압한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 결국은 타인의 인간성도 부인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 안에 한 치도 없는 내용이라면, 아무리 집단광기가 회오리를 일으켜도 동참할 수 없다. 사회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귀결시켜 책임을 개인에 전가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럼에도 시작은 한 사람부터라는 것도 사실이다.
집단의 광기에 에너지를 보태지 않으려면 결국 나부터 그러한 각성이 비롯되어야만 한다.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집단의식을 만든다.
#그림자
그림자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 모두 하루에도 수십 번 그림자가 작동하는 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수용하기 어려운 자신의 모습이 그림자 속에 들어 있다. 숨어 있는 내용을 찾자면 투사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모임에 참석한다고 치자. 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재는 자세가 엉망이네' '옷 색깔 참 촌스럽다' '건방 떠네' '아부하는 모습 이라니' '또 누구를 유혹하려 드네. 내 눈에는 보이지. 성능 좋은 스캐너처럼 한눈에 거슬리는 모습들이 들어온다. 이 모두가 본인의 그림자다. 다시 불편한 진실을 상기하자. 내 안에 없으면 거슬릴 이유도 없다.
진짜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지점이다.
그림자 낚시를 했으니 한발 더 나아가보자. 거슬렸던 동료나 친구들을 묘사하던 문장에서 타자화했던 주어를 바꾸어 전부 일인칭인 나를 붙여보자. '나는 건방져' '나는 사람을 유혹해.' '나는 아부를 잘해!' 하찮게 보일지 모르나 자신을 알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밝은 그림자도, 어두운 그림자도 결국 본래 내 것을 다시 내게 가져오는 것이 핵심이다.
한번 더 강조하건대 투시는 거울을 유리라 착각하는 것이다. 유리라 믿으면 유리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자신으로 부터 유리되어 사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태어남과 좋은 특질을 남에게 양도하고 산다면 이보다 더 큰 에너지 낭비가 또 있을까?
그림자에겐 메시지, 즉 이야기를 전해주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그리고 증상은 그림자의 이야기이다. 만약 피상적 긍정이나 밝음을 위해서 증상을 부인하거나 없애고자 한다면 오산이다.
그림자의 이야기는 영혼의 메시지와 같다. 증상이 나타날 때 고요히 멈추고 오래 버티며 그림자가 포함된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듯. 삶에서 그림자를 배제시킨다면 어둠만이 주는 신비는 어찌할 것인가? 어둠은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묘약이다.
우리는 빛, 승리와 긍정만을 노래하는 반쪽 이야기가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망각한다. 긍정과 희망과 낙관만을 노래하는 문화가 이를 조장한다.
알타이 이야기( 양민종)를 보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용사가 자신을 향한 영광의 노래에 공포와 패배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는가하며 이야기꾼을 나무라는 장면이 나온다. 만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수치심과 두려움, 후회와 패배에 대해서도 가리거나 덮으려 용쓰지 않고 이토록 '착한' '잘난체' '괜찮은 체' '강한 체' 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두렵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예전에 알았더라면 내 두려움이나 나약함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패가 있으니 승리의 영광도 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실패도 삶의 과정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남을 품는 가슴이 훨씬 넓었을 것 같다.
진정한 힘은 페르소나를 유지하고 자아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방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취약함과 두려움을 보듬는 것은 최고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자기 수용은 언제나 방어를 위해서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그리스어로 대파국katanlstrephein은 전복이라는 말이다. 이는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상황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는 의미다. '내가 지금 어떻게 바뀌어야 하지?" 파국의 의미에 개개인의 깨어남이 내포되어 있다는 그리스인의 지혜를 배울 때다.
#자아에서자기로
심리학적으로 주인을 자기 self라 하고 종을 자아 ego로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 저택의 책임자라 믿으며 산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니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산다. 자아가 강화된 현대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자아가 버티는 힘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벽 또한 견고하게 구축된 상태다.
마치 악기를 조율하듯, 어떤 시기에 이르면 삶의 주파수를 새로 맞추어야 한다. 이 조율은 자아의 삶에서 자기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화해는 일생동안 다뤄야할 과업이다.
삶에 의문이 생길 때, 질문을 명확하게 만들어 마음에 품고 주변과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본다. 이때 의미 있는 우연인 공시성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된다.
비관적인 메시지를 되풀이하는 대신 무의식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다른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에 안도할 수 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한 발 물러서서 지혜를 구한다. 무의식의 지혜를 듣고 좁은 자아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자기 (존재 또는 생명)안에 내재된 더 큰 힘을 확인하라. 그러면 현실에 갇혀 경직된 마음에 다시 상상의 힘을 불어넣고 열정의 불을 지필 수 있다.
무의식을 존중할수록 기다리는 인내력도 향상된다. 동시에 애매한 상황을 견디는 뱃심도 두둑해지는 듯하다. 무의식의 그림이 드러날 때가 행동할 때임을 명확히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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