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 UI UX 사용자 경험 말고, 인간 경험과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
최근 UX심리학 북스터디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새로운 키워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또한 그동안 생각치 못했던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뒤늦게 IT 종사자로 합류하면서 경험하고 배우게 된 UX를 게기로.. HCI, 디자인과 인간심리, 서비스 디자인, 심리학을 거처 철학에 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여정들을 지나 지금은 '사회학'이라는 정거장에 정차 중이다.
나는 그동안 웹기획, 웹기획, UXUI기획, 서비스 기획, PM, PO일을 해왔고 지금은 개발 PM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학이라니?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너무 가까워서 몰랐을 뿐이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분야의 ICT 또는 HCI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사출물은 기계와 사람간 인터페이스(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툴이고 그 툴을 사용해서 사람과 사람이 다양한 비지니그를 해봤던 것이다.
게다가 정말, 최근들어 다양한 생성형 AI가 단순히 논문이나 프로토타입 수준을 넘어 SaaS형태의 제품으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그래밍 아닌 개발은 - 마치 영화 히든피겨스에서처럼 처음 컴퓨터를 대면하고 능동적으러 대응했던 수학자들이 그랬듯, - 더이상 사람의 몫은 아니지 않나 싶다.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다행히 비슷한 온도의 글을 발견하게 되어 포스팅으로 남겨본다.
사회학은 당대의 경험과 삶의 이야기(내러티브)를 결합할 수 있다면 쓸모 있다. 반면 정보만을 제공하는 사회학은 쓸모없으며, 사회학이 권력에 팔려간다면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회학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 는 시대를 연결하고, 자신의 시대가 자기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평가하는 도구로 채택될 경우 성공적이다. p20
사회학은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늘 정의해오셨습니다. 이 정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먼저, 여기서 '인간 경험'이란 당신에겐 어떤 의미입니까?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 모두를 의미합니다. 개인과 세계의 접촉면에서는 두 가지 상이한 현상이 만들어집니다. 독일어에서는 이 두 가지 현상을 구별하지만,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식별 가능한 단어가 없어서 통상 이 두 가지 현 상을 모두 '경험experience'이라는 한 가지 개념에 뒤섞어버립니다.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 happens to me '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 I live through'을 의미 합니다. 즉 체험은 일어난 일에 대한 지각과 일어난 일을 흡수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합동으로 빚어낸 산물입니다.
경험은 (개인 상호간이나 혹은 그 상위에 있는) 객관성의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도 명시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경험과 체험이라는 개념을 다소 단순화하면, 경험은 경험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체험은 경험의 주관적인 측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좀 더 해석을 더한다면, 행위자가 개입하지 않은 경험과 행위자가 개입한 경험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요. 경험이 행위자의 외부 세계에 대한 보고서처럼 제시될 수도 있다면, 체험은 행위자의 '내면'으로부터 출현하여 사적인 생각과 느낌. 감정에 영향을 주기에 한 행위자에 의한 전달이라는 형태로 만 나타날 겁니다.
첫 번째 범주의 경험에 관한 보고에서 우리는 이른바 '사실'이라고 부르는, 상호 검증이 가능한 사건 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체험으로 전달된 내용들은 상호 검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행위자가 전달하는 신념들은, 말하자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궁극적 이면서도 유일한 '문제되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과 체험의 인식론적 지위는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경험과 체험의 상이한 인식론적 지위는 사회학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발생하는 적지 않은 혼란, 무엇보다 연구를 통 해 발견된 사실을 해석할 때 발생하는 혼란을 초래합니다. 관찰자가 제시하는 증거들의 타당성과 신뢰도는 관찰의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이라는 두 참여자를, 끝없이 벌어지는 '사회학과 인간 경험 사이의 대화'로 이끄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영어가 주도하고 있는 사회학의 담론은, 분명하 게 구별되어야 하는 두 가지 현상을 서투르게 통합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경험 ('나에게 일어난 일', 즉 사건의 '객관 화될 수 있는' 측면)과 체험(사건이나 상태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반향 이자 '주관적' 측면) 같은 독일어 개념들 말입니다. 사회학 담론 에서 흔히 경험과 체험의 구별의 부재는 인간의 리얼리티에 서 생긴 일, 즉 '체험된' 리얼리티를 단순 경험의 조사로 축 소시키는 경향을 낳습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 가 저하되고, 리얼리티의 구체적인 제시도 일그러집니다. p45
진리처럼 여겨지는 진단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확증되 기도 하고 또 반론에 부닥치기도 하는 최근의 사례부터 설 명해보겠습니다. 지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폴란드의 예술 가이자 애니메이터인 아르투르 즈미예프스키Artur Zmijewski 는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유명한 실험, 즉 사람들을 임 의로 죄수와 간수로 나누어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실험 을 반복했습니다. 짐바르도의 최초의 실험에서는 소름끼치 는 결과가 나왔었지요. 실험을 시작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고문자이자 살인자로 변신 했고, '죄수' 역할로 분류된 사람들은 희생자로 변신함이 또 렷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즈미예프스키의 실험에서 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고무적인' 결과가 나왔고, 이 실험 에 참가한 사람들은 즉각 찬사를 받았지요. 실험 참가자들 은 상호 이해, 관용과 연대의 정신에 따라 흡족할 만한 항구 협정을 만들어 서로 협력했던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관계 이론'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이론인데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엘턴 메이오Elton Mayo 가 시카고 근교 웨스턴 전기회사의 호손 공장에서 진행한 '호손 연구'에 기초한 이론이죠. 메이오는 노동자들의 규율 과 순종을 불러온다고 알려진 강압적인 방법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습니다. 그랬는데도 당시의 통념과는 달리 작업 의 효율성이 오히려 급격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상승하기 시 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지식의 입장에서는 이 실험의 결과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습니다. 테일러의 시대와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에서의 동작 측 정에 기초한 권위 있는 지식, 그리고 처벌을 바탕으로 한 체 제의 관행에 따른다면 말입니다.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흔히 '데카르트의 오류'라고 알려진 부수효과입니다. 데카르트의 오 류는 연구자는 주체의 위치를, 연구 대상은 객체의 위치를 지닌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합니다. 하지만 즈미예프스키와 메이오의 실험에서 '연구 대상'들이 실험적인 게임의 공동 참여자임을 알아채는 순간, 그 전제의 가면은 벗겨지고 일 축됩니다. 그들은 게임에 매우 중요한 공적인 의미가 부여 되어 있다는 암시에 부합하기 위해, 돌연 자신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책임감 있게 게임을 해야 한 다는 의무감을 갖고, 자신들에게 어떤 역할이 부여되어 있 든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례'들이 필요할까요? 이 두 가지 사례만으로 도 충분히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과학적 표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진리는 사실 데카르트적인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근거해 있습니다. 즉 과학의 진리는 이 이분법이 지켜질 수 있는 한에서만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인문과학' 에서는 그 연구 대상인 인간들로부터 주관성이 제거될 수 있는 한에서만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관성은 아우슈비 츠나 옛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같은 아무리 극단적인 시도 를 통해서도 제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 학적 진리 사이에는 인간의 주관성이라는 다루기 쉽지 않고 꿋꿋하고 제거될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 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대립이 아니라, 연구자의 지위를 갖는 가 혹은 연구 대상의 지위를 갖는가 하는 자기 정체성의 요 소도 있습니다.
예술은 (사회)과학(다양한 '사회적' 변형을 포함하여)과는 달리 대상의 진리를 그들의 '실제 삶'의 모습 속에서 포착하려 함 니다. '이상적 실험'에 의해 인공적으로 단순화되고 축소된 '오염이 제거된 위생화된' 조건 속에서가 아니라요. 무엇보 다 예술은 예술의 대상을 주체로 취급하도록 강제되고 있다 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대상으로서의 지위뿐만 아니라 고유 한 정체성을 동시에 전제하는 것이지요. 뉴트론이나 백혈 구, 지층과는 달리 예술의 '대상'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자는 인간 이라는 존재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해 야만 합니다. 물론 어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권위와 같 은 특권적 지위에 오르기를 꿈꾸지만, 이런 사정의 차이만 으로도 사회과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셈입니다. 사 회과학자들이 작가나 예술가에게 등을 돌린 채 눈을 자연과 학적 사례에 고정시키고 '자연'과학과 같은 '성숙한' 지위에 오르기를 꿈꾼다면, 그들은 사회과학자로서의 소명을 스스로 포기한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p52
왠지 사회학, 사회학자,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들을 읽다보면.. 왠지모르게 이런 단어들이 디자이너로 읽히는건.. 나뿐인가? 나만 그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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