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
보는 내내 먹먹했다..
빌런의 탄생이라 하기엔, 너무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앞으로는 조커를 빌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보통 사람을 향한, 돈없고 백없는 작은 개인의 몸부림으로 밖에 안 느껴졌다.
한 개인, 아서를 조커로 만드는 그 밑 바닥에 출렁거리는 것은 다름아닌 사회 전반에 스며있는 혐오주의였다.
아서는 자신에게 무례한 자들에게 까지 미소를 버였다. 깊은 내면의 분노를 계속해서 억누르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입을 벌려 억지로라도 웃음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고 자신의 직업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그, 그의 전부가 무시 당했다, 친구, 상사, 이웃, 가족, 자신이 동경하는 코미디언에게 까지..
우연하게 엉겹결에 벌어진 자신의 폭주에 그는 내면의 눈을 떴다. 당하지만 않는 선택을 한 것이다.무례한 이들에게 애서 웃음으로 화답하지말고 응징하자. 이것이 조커가 된 아서의 선택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낄낄거리는 조커에게 잔인무도 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감히 있을까? 그렇다면 자극적인 영상만 본 것일 수 있다. 조지가 그렇게 외치는 그 말들을, 마치 영화속 무미건조한 심리상담사 처럼 똑같이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서의 웃음은 행복보다 슬픔과 더 가까이 있다. 조커는 불특정 다수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조커와 아서가 바라는 것은 한 하나다. ‘내 말 좀 들어줘’
약한 자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이들은 비단 힘있는 자들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약자들도 무례하긴 마찬가지 였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질감이나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무례한 대우를 받는 이들과 같은 부류로 섞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양 극단이 판을 치는 배경에 이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 대한 혐오와 그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민은 정부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시민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 약자와 보통사람들의 싸움을 이용해 권력자들은 늘 같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보통의 청춘들이 느끼는 정치혐오에도 이와 같은 분노가 있을 것이다. 서로가 다른 곳에 서서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소리치고 있다.
나 또한 조커가 될 수 있고 무례한 이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반성아닌 반성을 다짐하게 되었다.
조커는 극좌, 극우를 불문하고 어느 쪽에서도 나올 수 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자기 보호적 태도가 오히려 상대쪽의 누군가를 조커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든 상대편의 하소연을 혐오의 눈초리가 아닌 진정어린 관심으로 들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자신의 정의 또는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을 죄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는데.. 다들 왜 이렇게 핏줄을 세우고 삿대질을 해 대는지 모르겠다.. 그만 큼 외롭고 무서워서가 아닐까 한다.
혐오의 세상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은 한 개인,
그 개인이 밀리고 밀려 서 버린 벼랑끝- 지칠대로 지쳐, 그냥 맥없이 뛰어내리려는 개인,
다른 개인의 무례함에 폭주를 해버린 개인- 잔악무도함이 커질 수록, 그제서야 눈길을 주는 다른 개개인들
빌런에게 ‘조커’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솔직히 누구에게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조커 아닌, 조커들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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