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think normal
기획 노트/핏과 결에 대한 소고

조직 문화 | 이런 경우도 있다

by 청춘만화 2023. 12. 17.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할 때 보통 ‘경우가 없다’는 말을 쓰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공공의 적


상위 조직(C레벨 간, 부서장 간 또는 팀장들 간의)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조직 내에 서로 다른(다름을 틀림으로 취급하지 않는) 다양성이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수 많은 건전함의 전제 조건들을 이미 내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재택근무 처럼 말이다.( 이 또한 매우 영악한 프레임 중 하나인데.. 재택근무는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또한 직원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자의 역량, 짬바의 문제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관리가 가능한가와 불가능한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 많은 과제에 대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반대로, 구직자의 경우 재택은 시행 여부보다 얼마나(기간) 시행했는가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물론 너무 잘 안다.. 세상에 그런 조직이 얼마나 있고 내 맘같은 도덕군자? 가 조직 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어른스러움? 예절? 존중? 기본적인 선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고 심지어 도무지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다 하도라도 말이다.
마치, 아버지(또는 어머니)가 자식을 훈육하는 동안 어머니(또는 아버지)가 자식의 잘못을 그 자리에서 감싸거나 두둔하면 안되는 것처럼,
아버지(또는 어머니)가 안 계실때 어머니(또는 아버지)가 상대에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을 자식들에게 마치 감정을 배설하듯, 습관적으 하소연하며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억울함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들면 안되듯이,
부모가 감정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게다가 결론도 없이 비난만 하다가 흐지부지 결론없이 다툼이 끝나는 모습들을 자식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보이면 안되는 것 처럼,
게다가 늘 어느 한 쪽을 몰아세우고 ’1:다‘의 대결 구도 로 소위 ‘공공의 적’ 만드는 프레임은 가족을 파국으로 모는 비열하고 단기적인? 술책인 것처럼,
조직 내 상호 간 최소한의 선을 지켜져야 한다. (아니면 조용히 내보내던가 아니면 조용히 본인이 나가던가.. 물론 그 즈음의 직책이면 자존심과 처자식이 있어 언행일치가 더 어렵겠지만..)

이즈음하면, 다른 층 다른 부서의 직원(특히 여러 측면에서의 장기 근속)이 사무실 한 복판에서 부서장의 의사결정에 때문에 ’너나 나나 너네 팀이나 이게 뭔 고생이냐‘라는 말을 큰 소리로 낄낄거리는 상황이 자연스러워지고

이만하면 외부 협력사와의 미팅에서 우리 회사 상황에 대한 비아냥이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안주거리로도 손색이 없어진다.

화룡점정은 이를 보지 못하는, 보고도 못 본척하거나, 오히려 두둔하는 C레벨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부 조직은 너무 태연하게 마치 전략이나 자신만의 노하우처럼 악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전혀 다른, 더 심각한 사이드 이펙트를 발생 시킨다.

C레벨 간 누구 한 사람을 왕따(물론 아니겠지만..? 공공연하게 비난)처럼 대하는 조직(문화 또는 분위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분위기를 타서 부서장, 팀장 심지어 그 C레벨을 비난한다.
서로 긴밀한 대화도 없었던 실무자까지 자신의 상위 조직 내 라인을 잡고 어려움만 생기면 C레벨 탓을 하는 실무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조직 내 수행해야한 모든 일들과 담당자들은 자신의 일에 댜한 책임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문제.. 심지어 회식 장소 또는 시간에 문제까지 모든 책임은 그 소외된 C레벨을 책임으로 돌아간다.

조직은 인사가 만사이다.

때문에 이런 조직 내 분위기를 보고도, 냄새(조직 문화)에는 관심없고 묵인(은 ‘동도 행위’와 동일하다)하는 인사 권한이 있는 책임자와 조직은 가장 먼저 도려내거나 이들을 상위에 감사를 구성해야 한다.

법인은 인격체이다. 그리고 법인의 생애주기 또한 사람의 그것과 같아서 암을 도려내는 것과 생존은 상황에 따라 별개의 문제이긴하다..




부정적 감정

부정적 감정은 무섭다. 또한 전염성도 매우 높다. 때문에 조직 내 정치에서 가스라이팅의 주요 소재로 쓰이곤 한다.
뇌는 감정에 취약하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형성(강화 또는 악화) 되기 이전에 뇌에는 이미 감정의 주름이 생긴다.
흔히 아버지(또는 어머니)처럼 (또는 안) 살거야! 하면서 닮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생존 본능으로 부정적 감정(negative bias)에 취약하다. 그래서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제품이 고객에 채 닿기도 전에
스스로 만들고 있는 제품을,
협업해야하는 부서를,
공감해야 할 팀 구성원들 간
수많은 사연과 이유를 들어 비아냥 거리기 시작한다




불안 그리고 불안의 정치


과연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불안 이 아닐까?

그럼 그 불안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아마도 어른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한만 있고 권위(솔선수범으로 자발적 공감과 인정을 받는)와 책임감 없는 이(들)가 있기 때문이다.

조직을, 그것도 성장하는 조직을 통제?하는 가장 효울적이지만 구태스러운 방식은 바로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 최고 의사 결정권자의 (개인적 친분이 아닌 조직의 대표로서의)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인사 권한이 있는 조직에 대한 관리이다.
시장 내 조직의 성장이 아닌 조직 내 본인의 체면 또는 의사결정에 대한 주도권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마치,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전쟁에서의 승리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이런 조직은, 인사 권한자들은 능력보다 말투를, 열정적인 사람보다 조직에서 오래 머물었던 이들을 선호하고 포섭한다.

이런 조직에서는 소문이 권력이다.
”아직 확정된(정확한) 건 아닌데.. 이건 너만 알아“하는 말이.. 분명 나만 알 수 있었던 말들을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그 오프더레코드는 구전으로 전파되며 조금씩 진화한다. 감히 맘카페의 그것과 비견될 수 있는, 소위 사내 정치는 이렇게 시작된다.



과거에는 사회와 시장과 세대의 분위기 상, 회사가 어려워도 책임감 있는 이들이 있기에 오랫동안 버티면서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사회와 시장과 세대의 분위기 상, 회사는 어려운데 오랫동안 버티는 이들이 있어 회사가 본의 아니게? 좀비 기업이 된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대략 이런 모양새로 흐른다

대표와 관리자가 대표하지 않거나 권위(갑질 말고 팀원들의 공감과 인정)에 관심이 없으면 자꾸 누구 좋은 꼴만 보이는 내 맘 같지 않은 상황에 현타가 온 혼자 짐 짊어지던 선배는 상처만 받고 회사를 떠난다.
그리고 선배들의 방어막 아래서 잘 자라던 후배들이 선배가 된다. 하지만 방어막이 사라진 후배선배들은 온통 불만이다.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배가 당하는 모습을 직관한 그들은 적당히 아주 교묘히 자신만의 선?을 지킨다.

선배는 단순히 먼저 시작했을 뿐이지(특히나 사회에서는) 더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위에서의 불안은 후배선배에게 까지 내려와 정착한다.

그들은 버틴다. 그것도 매우 잘. 그들은 불안에 떠는 상위 레벨을 누구보다 잘 공감한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알아서 잘? 한다..





불안의 워크 플로우

그 흔한 불안의 시대는 글로벌, 국가, 정치, 조직
할 것 없이 상위 레벨에 속한 이들의 불안과 이를 대하는 태도에서의 이기주의( 비겁함)에서 시작된다.
소위 막아주고 버텨주는 어른(스러움)의 부재가 원인이 아닐까? 이런 조직일수록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시키는 데로 잘 따르는( 내 눈 밖에서는 뭐라 하든 눈(들) 앞에서 불평하지 않는), 특히 장기근속(직장생활의 영속)해주는 이들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왜냐면 그래야 나(C레벨 > 관리자 > 실무자..)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서도 경우가 없는 경우는
아무래도 집 안의( 회사 또는 팀 내) 불만을 밖으로 자꾸 꺼내 옮기는 경우가 아닌가 한다

팀원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다른 팀원(들)에게서 동의를 구하기 시작한다. 이런 뒷소문은 때론 흐지부지 사라진다. 대놓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괜히 속 좁은 모양새만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중고등학고 또래 문화의 룰처럼, 대학 동아리 모임에서의 임묵적 합의처럼 그들은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룰을 따르기 시작한다. 결과는 늘 다수결로 이뤄진다. 그리고 다수는 오피셜하게는Yes- 한다. 그리고 이런 (자신 또는 타인의) 상황과 결과를 목격한 이들의 경험은 곧 학습된 무기력으로 정착한다. 적당히 무던하게 그들이 원하는 데로
그렇게 팀원 단위로 쌓이는 불안은 내 부서를 넘어 다른 부서의 누군가에게 토로하게 되고 그렇게 내게 생계를 이어가게 해 주고 커리어를 쌓게 해주는 회사의 불만을 파트너 회사 또는 경쟁 회사 담당자들에게 하소연하는 경우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는, 문제의 관리자는 겉으로는 Yes-하지만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렇게 욕하고 소문내는 이들을 늘 곁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진짜 모르는건가? 알아서 더 그런건가??



종종 드라마에서 부패한 귀족, 왜구 또는 일본 앞잡이?들에게 하는 말들이 있다. 작작 좀 해 먹어라! 최소한 나라는 살아 있어야 당신 빼먹을 비자금도 생기게 마련이지 않은가?!
회사가 어렵다면 부패한 관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료를 보면 백성은 내 처자식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일본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일보다 나의 불안과 부정적 감정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데 모든 걸 쏟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때 발견되는 또다른 특이점이 있는데, 바로 ’내가 그럴 줄 알았어.‘이다. 소위 경험자(주요 세력? 관리자)의 촉 또는 예감인데. 사실 이건 확증 편향이다. 예측이 맞은게 아니라 예측이 맞도록 상황을 만든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 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결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어쩌면 이 포스팅의 주제이기도 한데,
앞서 조직 문화를 냄새라고 언급했었던 것처럼, 부정적 감정은 뇌에 주름처럼 새겨진다고 했던 것처럼,
운이 좋게 그 원인을 찾고 애써 그 원인을 제외하게 되더라도.. 한 번 방안(조직)과 옷(부서)에 밴 냄새나 (나 또는 팀원 개개인) 입가와 눈가의 주름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타자가 아닌, 내가 나와서 다른 공간으로 가더라도 내 옷에 밴 냄새와 눈가와 입가의 주름은 나도 모르게 그대로 담아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마치 흡연하고 온 사람이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앉을 때처럼 말이다








문득,
소매를 올려 나의 체취를 맡아본다.


그냥, 그렇다고




PS.
그런데 가만 보면 지금 우리나라 경제나 사회 인식이나 정치의 면면들과도 비슷하단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후배 세대들에게 늘 미안과 연민의 감정이 인다. 물론 뭐 나조차, 내 세대 안팎에서 보통? 중간에 들지는 못해 `저나 잘하겠습니다..` 처지이면 서도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