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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지기/문장 발효 과학

유마경과 이상형( 화공 강설) 중에서

by 청춘만화 2023. 5. 14.


중국의 법률서인 유마경(유마힐 소설경)은 과거 힌두 신들의 노예였던 사람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부조리한 현실을 이상세계로 바꿔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절오빠?.. 이젠 절 삼촌..ㅜㅜ인.. 나는 개인적으로 법문으로만 접하다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유마경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담긴 책을 발견했다. 본래 법문보다 다섯배? 가량 두꺼운 책이라 가볍게 프롤로그?만 읽고 덮어야지 했다가.. 그 앞에 몇장이 훅-하고 들어와 계속해서 유리장 같은 마음 속을 휘졌고 다니기에..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몇 문장이나마 블로그에 묶어 놓아본다.






= 서막의 1장, 두번째 장에서 네번째 장 중에서 =


1.
무념무상이 연못가에 놓여 있는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마음의 절대적 부동화 상태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상태는 명령을 받지 않은 로봇이나 아예 감정이 없는 목석과 다를 바 없는 무생물이지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을 유지한 채로 무념무상에 이른다는 것은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미친듯이 불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는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환경의 변화에 따라 희로애락에 빠지는 나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희노애락하는 감정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외부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바라보는 시야가 나를 중심으로 하지 않을 때, 주변 환경의 변화는 더 이상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원리가 바로 제법무아諸法無라는 붓다의 교법이다. 간단히 말하면 환경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말이다. 나의 내·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2.
현실세계에서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주인공인 이상 누구나가 이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비극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기가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 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뿐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남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만이 이 현실이라는 무대에 등장한다.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인생은, 그저 희노애락하며 그저 끌려다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각본에 짜인 그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삶은 결국 현실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한 고통스러운 무대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유마경은 이 고통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현실세계가 바로 이상세계라는 것을 불이법문- 이원론적인 대립적 사고의 초월 - 으로써 설파하려는 것이 유마경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유마경의 가르침은 사바세계에 한쪽 발을 깊숙이 빠뜨리고 있는 나의 운명(인생)을 미래에 내디딜 다른 한쪽 발로써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곳- 이상세계-으로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운전해 다다른다는 가르침이다.





3.
인생의 비극은 비교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려면 비교하지 말라는 뜻이다. 선불교에서 수행자의 지침서 로 알려진 신심명에 "지도무난 유혐간택"이라 하여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다만 비교우위해서 취사선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한다. 과연 현실세계에서 비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가치관은 대부분 이원론적 비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은 사물 또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물을 대립적 관계에 의해서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겪는 그 대립적 관계, 즉 이상과 현실, 성공과 실패, 번뇌와 보리(지혜), 흑과 백, 선과 악 등의 대립적 가치관은 나를 중심으로 하여 분별함으로써 생겨나는 차별심으로 본다. 스스로의 마음에서 만들어 내는 이 차별심, 분별심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라고 불교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사실 불·보 살은 중생에게는 구세주가 될지언정 사마외도들에게는 야차보다도 더한 악마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내가 나를 중심으로 하지 않을 때는 사마외도라는 차별심조차 생기지 않는다. 단지 여기서 사마외도라고 구별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자타를 불문하고 인간이 벗어나고자 하는 고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과 악,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선과 악, 성공과 실패라는 가치를 그대로 지니고 있지도 않으며, 도리어 선이 악 이 되며, 악이 선이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실패가 성공이요, 또 성공이 알고 보니 실패였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 일이 허다하다. 일체 사물이 무상하기 때문에 그러하며, 또 스스로의 무지무명에 의해 성공과 실패 또는 악과 선을 바로 못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사물을 인위적인 배움이나 경험에 의지하여 분석하고 차별함으로써 오히려 사람은 사물과는 동떨어진 왜곡된 가치관을 갖게 된다. 결국 그 왜곡된 사고를 바탕으로 한 행동은 고통과 연결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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