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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지기/문장 발효 과학

예민함이라는 무기를 만나다

by 청춘만화 2019. 4. 16.

지난 주말 알라딘에서 예민함이라는 무기를 만났다.

 

심리학으로 분류되는 책이다. 늘 그렇듯 지각의 시작은 타자에 대한 이해가 목적이 었다. 하지만 한장 두장 넘길수록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이해를 이유로 오랫동안 책을 놓지 못했다.

 

처음에 눈길을 멈춘 글귀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에너지를 그쪽으로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사랑스럽게 주목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은 이런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엄마 이것 좀 봐요!”라고 외치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주기를 요구한다. 아이들은 지치지 않고 주목을 요구한다. 심지어 말썽 부려서 받는 주목도 아예 주목을 받지 못해서 에너지를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긴다. (p.118)

나중에 양육을 하게 될 때가 오면 아이들의 행동을 개선하기 위해서 그때 그때 주의를 기울여주는 것 외에도 옆에 있든, 멀리있는 항상 지켜보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또는 확신 시켜주는(또는 줄 수 있는) 과정들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넘기다보니 내용이 타자를 이해하거나 양육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먼저 꿈틀되고 있음을 지각하게되었다. 아이들이 주의를 요구한다면 어른들은 성과와 인정을 통한 급여인상, 진급 등을 쫒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른들도 비슷하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많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 자신들이 수고한 것에 대한 주목이나 공명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괜한 갈등이 초래되거나 일이 삐걱대어 힘 빠지는 느낌이 들 때, 사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계속 자신의 주의를 외부로만 향하게 하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큰 에너지 출혈을 경험한다. 지각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스스로를 약하게 만드는 셈이다. 지각과 주의력은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조절하는 열쇠이다. 지각을 의식적으로 다룸으로써 자신의 에너지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 (p.118)

 

 산업혁명과 같은 사회 혁명의 시점은 기술이 발명,발전되는 시점이 아니라 대중에게 보편, 보급화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와 노트북이 유행하고,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는 소위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국은 2008년 국내는 2010년을 기점으로 모바일 시장, IT 기술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 시점이 정보화 혁명의 시대이다. 물론 개인적인 주장이다. 이 정보화 혁명의 시기를 기점으로 보편적 개개인의 인지와 지각의 범위가 조정되기 시작한다. 뇌의 역할과 능력 또한 재조정되기 시작했다.

특정 사건 또는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줄이는 습관? 어쩌면 뇌의 기본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보화 혁명의 원천이 되는 제공되는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인간에게는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들고 있다. 인간의 뇌의 역할은 위협을 받고 있다. 학습된 지식이 아니라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있지만..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인간의 신체를 주관하던 역할에서 분할되어 객체화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발용어를 빌리자면 내부 CLASS와 같다고 할까?.. By the way, 주의를 기울이기를 멈출 시간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부분 역시 책 뒷부분에 기술되어 있었다.

두뇌는 추상적인 자극을 받아들여, 현실에 대한 감각적 인상들을 만들어 낸다. 이때 아무리 예민하다 해도 주어 지는 모든 자극을 고려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자극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두뇌는 자극들 중에서 중요해 보이 는 것들만 걸러서 들여보낸다. 지각의 필터, 의도, 가정, 가치관이 다르면 똑같은 상황, 똑같은 조건에서도 세상 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지각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호감 이웃의 잔디깍기 소리는 안들리고 비호감 이웃의 잔디깍기 소리는 귀에 거슬린다.) 지각은 우리의 관심사와 기대, 바람, 욕구, 지식, 경험, 과거, 이론 개념, 프로그램, 가치관, 의미의 영 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p.121)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필사적인 행동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인간의 활동은 불편한 개선이 아닌 보다 더 편리함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바뀌어 갔다. 빨라진 교통의 속도, 인터넷의 속도, 덕분에 보편적으로 방대해진 교양의 수준, 뉴스는 이미 뉴스가 아닌 엔터테인먼트 적인 미디어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지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그러한 상황에 내맏겨진 개개인은 소셜이라는 채널에서 자신에 대한 주목을 이끌기 위한 행동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비슷한 내용 역시 뒤에 이어서 기술되어 있었다.

우리는 정적인 자극보다 동적인 자극을 더 강하게 지각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일수록 더 강하게 지각한다. 
또한 두되는 이미 알려진 자극보다는 새로운 자극에 더 강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두뇌의 메커 니즘의 도움을 받아 변화와 새로운 위험을 적시에 지각하고 , 뜻밖의 먹거리들을 신속하게 발견해 생존할 수 있 었다. 나아가 뇌는 새로운 자극들을 능동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요즘처럼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변화의 속도 가 빠른 시대에 두뇌의 이런 작동 방식은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한다. 퇴근 후에 집에 가서 무조건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저녁을 먹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텔레비전을 켜고는 시끄러운 자극을 받아들이고 있더라고 말이다.
지각을 자기 자신에게 기울여 중심을 잡는 동시에 바깥 세상을 완전히 도외시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지각을 조절하면 에너지가 생기고 스스로를 더욱 펼쳐 나갈 수 있으며 더욱 즐겁게 살 수 있다.(p.123)

 

 

내부 업무와 공정을 공유를 위해 만든 엑셀 서식이 있었다. 개인이 자신의 to-do list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전체의 공정이 취합되고 공유될 수 있도록 만든 서식이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와같은 성과?를 이뤄낸 이유가 이 지점과 유사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한 일들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엑셀 일정표를 지켜보고,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주목을 끌기위한 행동과 지각은 이 한 채널에 집중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한 개인이 타인을 관리하는 것은 존엄에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그 각각의 대상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몇년 전 부터 하게되었다. 소위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의 존엄이 점차 강화될 것이다. 그만큼 인간 개개인의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은 병, 전쟁, 폭력과 같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감정, 가치관과 같은 정신적인 측면으로 레이어가 바뀌고 있다. 야생에서는 동물과 인간이라는 큰 묶음으로 사투를 벌여왔다. 조금 더 가까운 과거에는 계급 또는 국가를 기준으로 하는 집합으로 생존의 운명이 함게 할 수 있었다. 최근의 생존은 각자도생이다. 민족, 지역, 학연, 지연의 집합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아마 시작은 공정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과 사생활까지 투명하게 공개된 시대, 그리고 그 투명하게? 공개된 정보를 일부 기득권만 활용할 수 있는 기대에서 인간 개개인의 생존력은 더더욱 쪼글어 들고 있다. 투명의 시대, 개인정보만 다 까발려졌다고 해야하나? 

 

 

생전 처음 이명을 들었다. 삼팔광땡의 2019년 봄은 잔인하다. 주방 환풍기 소리가 웅웅거린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아이디어들이 멈추지않고 확산된다. 상상력? 잡념? 그런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이 모두가 나도 모르게 지각에 집중하게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지각을 학습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각을 수동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지각은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지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결정이 필요하다. 
바깥 세계의 자극들에 휘둘려 반응만 하는 데서 멈추지말고 지각을 적절히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실 특정 활동에 집중할 때 우리는 늘 지각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그것에 생각이 미칠 때, 다시금 그 소리가 난다는 걸 알게 된다. 노트북의 팬소리, 정원의 새소리, 공사장의 소리. 하지만 이제 정원에서 지저귀는 지빠귀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로 결정한다. 그러자마자 공사장의 망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나는 고요한 숨소리를 느끼고, 기지개를 펴서 근육을 수축시켰다. 이완시키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일에 집중한다. 
우리를 방해하는 자극들은 우리의 신경계를 통해 강화되어 무시하기 힘들다. 그러면 우리는 거슬리는 지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지만 좀처럼 이런 자극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원인들을 제거하지 못한 지각이 우리를 거스를수록 우리가 더욱더 강하게 그것들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극들을 강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힘들기 때문에 더욱 그런 자극들을 막고자 한다. 그러면 자극들은 그들에게 더 강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은 더욱 줄기차게 이런 자극들을 거부한다. 이러한 자극과의 관계를 인식하면 삶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매커니즘을 인식할 때, 우리를 방해하는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다.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싫지만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예민한 성향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람이나 삶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정신적 성숙이 필요하다.

 

아,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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